AHORITA

블로그 이미지
_미믜

Article Category

+ (441)
간거잘앙 (132)
잘앙아님 (123)
본거잘앙 (164)

Recent Comment

http://m.hani.co.kr/arti/opinion/column/754491.html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는 독특한 책이다. 예술가의 전기인데 “일상의 과육이 해체되는 이 순간, 푸가의 골격에서 찾아지는 힘” 같은 시로 쓰인 또 하나의 예술이다.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932~1982)가 가장 좋아한 음악가는 올랜도 기번스였지만, 그는 여전히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과 동의어다. 중간에 그의 흥얼거림이 들리는 연주, 둔하기 짝이 없는 내 귀에도 이 곡은 초반부터 굴드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피아노는 음 소거 효과가 있다. 세상을 잠재운다. 위로와 평화. 우리가 누울 곳, 한여름 깊은 산속 부드럽고 서늘한 흙 같다.


나이 혹은 ‘나이 오십’을 고민하는 독자라면 이만한 생애가 없다. 굴드는 피아니스트로서 절정을 맞은 서른두 살에 은퇴, 은둔 중 오십에 사망했다. 완전한 은둔은 아니고 연주회, 콩쿠르, 사람을 극도로 싫어했다. 녹음 작업을 통해 완벽을 추구했다. 깜깜한 우주에 오직 두 개의 존재, 굴드와 피아노만 보인다. 가당치 않은 비교지만, 나는 서른두 살에 뭔가를 시작했고 그 뒤로도 방황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는 이미 삶을 완성(죽음)했다.


비루함, 모욕, 분노가 일상인 이 지옥에서 은둔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요긴한 책이다. 지금 여기가 사람이 살 곳인가. 인류가 멸망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우리는 감각을 잃었다. 사는 방법은 세 가지. 하나는 글자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서’ 살 수밖에 없는 생잔(生殘), 또 하나는 유사 죽음인 은둔이나 과다 수면, 마지막은 자살 혹은 자살 고민 상태다.


  굴드의 은둔은 자기 방식의 적극적인 삶이었다. 그는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호모 사피엔스다. 재능이나 명예, 불후의 음반 따위가 아니다. 짧고 알찬 삶. 부질없고 어리석은 시간이 없었던 듯하다. 그는 “혼자인 것과 함께 혼자여야 한다(alone with the alone)”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141쪽). 그것이 ‘성공’ 비결이다. 그의 은둔은 사랑하는 음악과 단둘이 하나가 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었고, 당연히 외롭지 않았다.


  현대인에게 외로움은 큰 숙제다. “외로움=혼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지만 사람들은 타인을 찾는다. 대개는 더 외로워진다. 자아는 작아지고 외부에 의존하게 된다. 후회스러운 경우가 많다(“괜히 만났다”). 외로움은 타인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관계다. 자신이 몰두하는 대상이 몸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다울 때 인간은 외롭지 않다(“미천한 저의 사랑을 받아주세요”). 예술, 공부, 사회운동, 정치, 자연이 그런 대상이 아닐까.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권력자다. 자기 충족적 삶은 최고로 힘을 가진 상태다. 인간은 권력 지향적이기 때문에 권력감이 없으면 외로운데, 자기 몰두형 인간은 권력에 무심하다. 사실, 이 행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


한국은 ‘관계사회’다. 연대와 상부상조가 아니라 인맥을 관리하며 사익을 도모하는 ‘우병우·이건희·나향욱·진경준’ 식의 관계, 연줄, 세습 사회다. 이 궤도에 끼지 못하면 낙오했거나 외롭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내 주변의 진보남, 페미니스트, 각종 소수자 대표 중에서도 유명인이 되기 위해 노력과 인격 대신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 많다. “여럿이 함께”는 혼자인 것과 함께 혼자일 수 있을 때만 가능하고 또 의미가 있다.

Trackback 0 and Comment 0

prev Prev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 : [123] : Next next